이번 일요일은 간만에 홀로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 일요일은 대체 얼마만인지.
이번 주차의 커리큘럼은 KAIST PintOS User Program 구현. 코드를 이해할 때 머리칼을 하도 움켜쥐어 탈모가 올 것만 같았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교육장 여기저기에서는 육두문자가 터져나오고, 교육생들의 외식이 눈에 띄게 잦아진 걸 보면 나만 힘들어 하는 건 아니란 거겠지.
아무튼 PintOS가 그만큼 힘들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씻고 나오자마자 나의 6일짜리 배터리는 0%를 가리켰고 바로 기절 해버렸다.

눈을 뜨니 방 안은 일요일 오후 2시의 나른한 햇살로 가득 차 있었다.
분명 이런 이름의 향수도 있었을 터인데.
잠의 달콤함을 벌써 뱉고 싶지는 않아 억지로 눈을 감아보았으나 이미 저만큼 달아나버린 뒤였다.
그리고 전 직장 꿈을 꿨다. 장소가 본관인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분명 결재를 받으러 가는 꿈이었을 거다.
먼저 확실히 해야될 것은 내게 전 직장 꿈은 악몽이 아니며 나는 전 직장을 아직도 사랑한다.
오해의 소지가 매우 심각하게 크게 있을 수 있는 발언이지만, 매일 교육생 친구들이 그 기업의 제품을 사용하는 걸 볼 때마다 오묘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정작 나는 안 쓰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의미가 분명히 있었지만, 5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결재판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는 건 내 일과였다.
본관에서 사무실까지는 약 500m, 한 번만 왔다 갔다 해도 1km를 걸어야 한다는 걸 나의 보스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의미가 있나?
이 질문은 내가 제일 듣기 싫어했던 질문이자, 매일같이 들었던 질문이기도 했다. 이왕 '요즘 MZ것들'로 묶여 공격 받는 김에 모든 일에 의미가 꼭 있어야 합니까! 라고 반항해볼까 한 적도 더러 있었으나 끝내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다는 걸 이제는 말할 수 있겠지.
물론 나라고 의미 없이 업무를 진행하는 건 아니었다.
온갖 데이터를 끌어모아 수치화하고, 차트와 그래프를 넣는 둥 속된 말로 생쇼를 다 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질문은
그래서, 이거 의미가 있나?
퇴근도 아직 안 했는데 오늘의 걸음 수 가 1만보를 찍는다는 게 더 이상 놀랍지 않아질 쯤에 깨달은 것은 저 질문은 매우 효율적이라는 것이었다.
아주 간단한 질문 하나만 던져도 부하 직원이 며칠간 야근하며 더 좋은 퀄리티의 품의서를 가져온다니, 이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까!
그리고 또 하나 깨달은 것은 결국 일은 사람이 한다는 것이었다. 팀장님도, 전무님도, 오너도 결국 사람이라는 것.

현장에서 나오는 데이터도 물론 여전히 중요했지만, 그 뿐 아니라 이 부서 저 부서를 넘나들며 내 결재 라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소설을 쓰기 전에 예상 독자를 타겟팅하고 글감을 얻어야 하듯, 나도 품의서에 스토리를 담기 전에 그들이 어떤 장르와 아이템에 마음이 움직이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내 전공도, 직책도, 부서도, 아니 내 인생 자체가 인문학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지만, 결국 나의 결재 라인이 그들의 도장을 들게 한 건 인문학 덕분이 아닐까 싶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무렵에는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처럼 창작, 작문에 대한 책을 다독한 게 기억난다.

그렇게, 의미 없던(물론 내게는 처음부터 의미가 가득했지만) 것을 그들이 좋아하는 각도로 살짝 비틀고, 여전히 그들이 좋아하는 명칭과 문구를 바꾸는 것으로 의미를 만들어냈다.
잠깐, 만들어냈다? 정확히는 의미를 느끼게 해줬다. 혹평 받던 영화가 모 영화 평론가가 좋은 점수를 주면 호평을 받기 시작하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깨달은 것은, 이게 더 힘들다는 것이었다. GPT같은 LLM도 쓸 수 없는 환경이었으니 창작의 고통 뭐 그런 거였을까?

모든 것에 의미가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마치 직업병처럼 나의 모든 행동에 자문한다.
이거 의미가 있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모든 것에 의미가 있을 수는 없다. 그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의미 없는 행동은 의미가 없다. 누군가 그 의미를 인정하고 공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단순히 낮잠을 몇 시간 자겠다면 전혀 의미가 없지만, 그의 목표가 피네간의 경야 같은 소설을 쓰는 거라면 그 때부터는 의미가 생길지도?
시간이 늦었다. 내일도 PintOS 코드의 의미를 찾아야 하니 이제는 펜을 놓고 침대로 가야겠다.
삶은 의미 찾기의 연속인 걸까? 그렇다면 탈모약이나 미리 먹어둘까.


괜찮은 탈모병원 아는데 필요하면 말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