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내가 직접 하던 일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위임했다. 이 일을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위성 운영 일도, 본체와 인터페이스를 개발하는 일도, 여러 환경 시험을 수행하는 일도 동료들에게 모두 위임했다. 그래도 일이 내게 많이 몰려있다는 느낌이 든다. 올 한 해 더 많이 위임하고 나는 스태프 엔지니어처럼 일하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위임을 잘 하는 한 해가 되면 좋겠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위임은 대게 나에게 어려운 일이 었고, 어떤 경우는 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언제 그런지 생각해 본다. 먼저 동료와 목표가 구체적으로 공유되어 있는 경우 위임은 쉽다. 특별히 코드의 퀄리티를 신경쓰지 않고 기능적 목표만 달성하면 되는 경우에 기능 목표 수준이 구체적이면 위임이 쉬워진다. 만약 코드의 퀄리티까지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달성하고자 한다면 위임은 어려워진다. 우리 팀은 아직 코드 퀄리티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까지 공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증가한다. 결국 기능이든 코드 퀄리티든 서로 같은 목표를 구체적으로 바라보는 경우 위임은 쉬워진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구체적인 목표가 공유되지 않았더라도 동료가 스스로 일을 분석하고 스스로 세부 목표를 수립하며 일을 진행시키는, 능동적이고 능력있는 사람이라면 위임이 쉬워진다. 이런 사람과는 최종 목표만 싱크를 맞추면 되기 때문에 위임의 시너지가 가장 큰 경우이다. 하지만 경력이 많지 않은 개발자의 경우 이런 수준에 올라오기 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린다. 그렇다고 주니어 개발자에게 항상 목표 스펙을 구체적으로 정해주고 코드를 작성하게만 하면 그들의 성장은 제한적이게 된다. 어린 동료가 성장하기 원한다면 시간을 투자해 그들이 스스로 목표를 구체화 하며 일해보게 해야 한다. 구체적 스펙을 코드로 구현하는 일은 이제 AI가 더 잘할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다. 상황에 따라 절묘하게 위임을 잘하는 한 해가 되기를 스스로에게 바란다.
연말에 외부에 전문가 그룹을 상대로 하는 기술 세미나를 준비하게 되었다. 우리가 가진 기술을 소개하는 자리인데 그들의 기준과 우리의 개발 철학에 상당한 거리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먼저 서로의 관점을 동기화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시간인데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문제를 바라보면 불필요한 논쟁이 있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정리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발표 자료의 첫 장표에 ‘적정기술’이라는 컨셉을 소개하는 자료를 넣었다. 아래 발표 자료 첫 장표와 발표 스크립트를 공유한다.

적정기술이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기술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딱 알맞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적정기술을 생각할 때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기술을 적용하는데 드는 비용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을 적용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나쁜 일의 가능성, 즉 리스크입니다. 위 그래프는 이 둘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그래프의 오른쪽 아래를 보시면 기술을 적용하는데 비용은 많이 들지만 리스크는 매우 낮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왼쪽 상단을 보시면 기술을 적용하는데 드는 비용은 매우 저렴하지만 리스크가 매우 높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처럼 비용과 리스크는 반비례 관계에 있습니다. 단순하게 이 그래프를 해석한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곤 한 것 같습니다. ‘아! 돈을 많이 써서 좋은 재료, 많은 시간, 완벽한 공정을 적용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구나!’ 그래서 리소스를 많이 투입해서 더 완벽하게 만드는데 집중하곤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다른 시선으로 이 그래프를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다시 그래프 오른쪽 아래를 보시면, 비용을 아무리 많이 투입해도 리스크가 ‘Zero’가 되지는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동차를 예로 들면 볼보 S90같이 좋은 부품을 사용하고, 유럽의 엄격한 안정성 시험을 통과해 안전하다고 소문이 난 자동차도 사고가 나면 운전자가 죽을 수 있습니다. 다시 그래프의 왼쪽 상단도 보면, 이번에는 반대로 아무리 저렴한 비용을 들여도 반드시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가 나면 사망에 이를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조심해서 안전히 타면 사고가 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저희 같은 스타트업들은 이 둘 사이의 어딘가, 즉 가능한 낮은 비용으로 기술적으로 커버할 만한 리스크를 가진 최적의 지점을 찾는 실험을 계속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회사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볼보 S90 보다는 훨씬 저렴하지만, 오토바이 보다는 안전하고 성능이 좋은 둘 사이의 절묘한 지점을 찾고 광범위하게 활용하는게 우리의 미션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회사도 볼보 S90 같이 크고 더 완벽한 위성 개발에 노크를 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비지니스에 대해서 사실 잘 모르기도 하고 회사의 방향성을 완전히 이해한 것이 아니라 아직 뭐라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정체성에 대해 약간의 혼란을 겪은 것은 사실이다. 새해를 맞아 볼보 S90 같은 프로젝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듣고 보니 우리의 정체성은 변한 것이 없다. 조금 더 비싸고 큰 제품을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이 안에서 최적의 비용으로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 한다. 한 해 조금 색다른 방식으로 최적의 지점을 찾는 우리의 실험은 계속될 것이다.
올해 진행한 프로젝트에서 해외 협력사의 인터페이스 구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이 정의한 시스템 인터페이스 문서에는 구현에 필요한 세부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았고, 계속 말로 이것 저것을 설명했지만 실제 제품은 그들의 말대로 동작하지 않았다. 지난 일이고 이런 말 하는게 미안하지만 그때 그들의 산출물과 일하는 태도는 정말 수준 이하였다. (지금은 일을 잘해주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래도 일이 진행되도록 몇 달 동안 그들의 시스템의 잘못된 동작들에 대해 피드백을 주었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며 세부 스펙을 찾아가는 일을 했지만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을 그들의 무책임함이라고 해야할지 불성실함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둘 다 아니고 단지 능력의 부족함인지 잘모르겠지만 어쨋든 그들은 그때 선을 많이 넘었다. 한 동안 이렇게 일을 진행하다가 어느 순간 우리의 리소스가 지나치게 낭비되고 있다고 판단되어 그들에게 문제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며 푸시를 해보기도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도리어 더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태도로 반응해왔다. 그때 깨달았다. 문제가 있는 사람을 이렇게 푸시해서는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고, 나 자신도 이런식으로 일하면 굉장히 지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마도 올 해 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래도 저래도 잘 안되었지만 그래도 그들을 잘 타일러 조금씩 일을 진행시키는게 그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했고 그들을 달래어 일을 다시 진행시키고로 우리의 태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나 연말 회사 방학이 되기 직전 거의 1년을 끌어온 문제의 해결점을 찾게 되어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휴가를 갈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 우리의 리소스가 지나치게 사용된 것은 사실이다. 내부의 의견도 많이 갈렸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우리가 얻게 될 것이 더 많을 줄 믿는다.
앞서 소개한 이 해외 협력사는 사실 대외적으로 무척 훌륭한 회사로 알려져 있다. 링크드인에 들어가보면 엄청난 성과들이 PR되고 있기에 나도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그들의 실상은 많이 달랐다. 그런 그들을 보며 우리 자신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타트업에서는 대외적인 PR에 힘을 쏟는데 우리는 외부에 우리를 소개한 것처럼 진짜 일을 잘하고 있는지 돌아보았다. 사실 나는 올 한해 우리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 만큼 내부의 실상도 당당할 수 있도록 노력한 것 같다. 우리 회사의 스피커들(대표님이나 사업부의 임원들)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싶었다. 작년 만 해도 사업부서와 개발부서의 간극이 꽤 크다고 느꼈는데, 점점 더 그 간극이 좁혀져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좋은 징조라고 생각하고, 더욱 힘을 낸다.
팀 내에 갈등도 있었다. 한 번은 평소에 마음이 잘 맞는 동료와 마음이 상하도록 갈등 상황을 맞이 한 적이 있는데 그는 내가 소프트웨어 파트 리더로서 집중하고 있는 몇 가지 작업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나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고 그리고 철저히 우선순위에 따라 일하고 있었는데 의사소통의 부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무척 속상하고 마음이 다운 되었지만 다행히 마음을 잘 추스릴 수 있었고 앞으로는 내 생각과 계획을 다른 사람들에게 더 소상히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지난 일들은 그냥 떠내려 보낼 수 있었다.
연말에 신뢰하고 존경하던 다른 팀 동료의 퇴사 소식을 들었다. 그는 내가 내 뒤를 맡길 수 있는 든든한 사람이었고 함께 일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은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위성 사진을 잘 찍어주면 뒤에서 그가 사진을 잘 처리해 줄거라는 믿음 같은게 있었다. 그의 퇴사 소식과 퇴사 이유에 대해 들으며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에게 퇴사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고민들이 함께 일어났다. 그러나 내가 직접 경함한 일은 아니기에 그에게서 받은 인상들은 우선 지우기로 했다. 하지만 마음이 개운하지는 않다.
세 번째 위성 개발에 뛰어들기 직전이었는데, 이 프로젝트에 대한 이상한 거부감이 일어났다. 회사 전무님께서 내가 약간 이상해 보였는지 면담을 요청해 오셔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전무님과 대화를 하면서 내 마음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것 같았다. 나는 우선 기존에 어렵게 성공시킨 위성 라인을 접어두고 볼륨을 키워 새로운 위성 라인을 개발하는 것에 아쉬움이 있었다. 점진적인 개선을 통해 기존 위성을 더 업그레이드 하고 싶은게 많이 있었기에 다른 것을 시작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낀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위성의 볼륨을 키운 새로운 프로젝트에서 소프트웨어적인 챌린징이 별로 없다고 내가 느끼고 있었고 소프트웨어는 거의 그대로인데 물리적인 렌즈만 갈아끼우는 듯한 느낌이 들어 일에 대한 의욕이 조금 떨어졌었다. 전무님과 대화를 한 후 스스로 답을 찾게 된 것 같다. 사실은 곰곰히 생각해 보니 내 고민은 서로 모순되어 있었다. 기존 시스템에서 점진적으로 개선할 것들은 새로 개발하는 위성에 기존 기반 코드를 가지고 가서 적용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 자체가 소프트웨어 파트의 챌린징이었다. 내 생각은 때때로 이렇게 모순되어 글이든 말로든 객관화 해보는게 중요함을 느꼈다.
여러 어려움을 잘 뚫고 1년을 버틸 수 있었다. 모든 순간 마다 나의 도움과 위로가 된 동료들에게 감사하고, 그것 위에 계신 나의 하나님께 감사함을 느낀다. 2026년을 시작하며 어려운 일들이 눈 앞에 첩첩 산중 쌓여 나를 기다리고 있다. 과연 내가 이 일들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생각하다가, 그런 생각은 무의미함을 느낀다.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지만 이 모든 일들을 내가 나 혼자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나의 일을 묵묵히 올 해도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