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어 개발자 일기] 후지산의 힘을 빌려 사색하다 :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나

드림보이즈·2025년 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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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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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0 ~ 2024.12.25

퇴사한지 어언 2개월. 헤드헌터를 통해서 지원한 큰 기업, 구직활동을 위해 지원한 큰 기업, 외에는 제대로 단 한 곳도 지원하지 않았다.
월급이 밀린 그 날부터, 퇴사일까지 1개월 동안은 꽤나 열심히 공부했다. 10월 공휴일 모두 공부를 하고, 남아서도 공부를 하고, 개발을 하고...

막상 퇴사를 하고 본가에 내려오고, 실업급여다 병원이다 바빴던 첫 1주일이 지나고, 난 3주 간 공부를 1도 안했다. notion 플래너에 다 남아있다.
나는 왜 입사 지원을 하지 못했는가? 개발하던 "블록체인 클라이언트" 프로젝트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럼 빨리 개발을 하면 될 것 아닌가? 그게 그렇게 물 흐르듯이 진행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참으로 쉽지 않다. (내가 ㅂㅅ이어서 그런건 팩투)

코딩 테스트는 딱 풀 문제가 1개 1개 정해져 있다. 강의를 듣고 정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는 To-Do 리스트를 정해서 탁탁탁 할 수가 없다.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에러, 막상 개발을 하면서 필요한 새로운 기능들,
앞으로 나아가려 하면 옆에서 칼이 쑥쑥 들어온다.
프로젝트 규모도 혼자서 카바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진다. 집중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치 수술실 의사처럼, 내가 작성한 모든 코드를 기억하면서, 신중해야 한다.

개발자들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 내 생각대로 코드를 작성했는데 잘 안되면, 멘탈적 데미지가 장난이 아니다.
이처럼 기한없는 개인 플젝? 안해 슈발이 절로 나온다.

이 글을 작성한 시점(25년 1월 중순) 돌아보면 나는 1차 완성본의 65%즘 와있었다.
그렇게 "운동, 식단 했으니까 내일 하지 뭐~"라며 자위를 하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12월 13일즘이었나,
'이렇게 하기싫어 하면서 안하고, 기분은 찜찜하게 날릴거면, 차라리 여행을 가자'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행을 참 좋아한다. 그런데 혼자서는 국내 여행도 가 본적이 없다. 그런데 해외라고? 영어도 안되는 일본이라고?
여행지는 정해져 있었다. 일본의 시즈오카.
싸고, 가깝고, 저렴하고, 대자연이 있고, 한국인이 많이 없는, 최적의 여행지였다.

나는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나는 사색해야 했다.
한국 사람이라면 더더욱이, 스스로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하루 5분도 안될 것이라 장담한다.

대화를 하지 않으면 핸드폰을, 핸드폰을 보지 않더라도 음악을, 나는 항상 외부에 마음이 위치해있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잖아, 뭐라도 보고, 들어야지.
밥을 먹더라도 반드시 유튜브가 있어야지. 어딜 이동하더라도 음악을 들어야지.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은, 자기 전 방의 불을 끄고, 누워서 잠이 들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후지산의 힘을 빌려 사색하기로 했다.

'절대로 가서 가사있는 노래 듣지말고, 카톡하지 말고, 동영상 보지말자'

내 결심이었다.

19년도에 유럽을 다녀와 5년 반만에 "혼자" 해외를 간다. 두렵기도 했다. 귀찮았다. 출국 전날까지 취소할까 생각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몸을 이끌고 새벽 심야버스를 타러 갔다.

비행기가 구름 아래로 내려왔을 때, 후지산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이 때부터 기분은 500% 좋아졌다.
가깝고 비슷한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세상이었구나.

숙소를 향하는 버스안에서, 나는 점점 후지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무 생각이 안든다. 그저 감탄할 뿐이다.

나는 시내와는 멀리 있지만, 후지산이 창문으로 보이고, 주요 관광지가 가까운 후지시에 묵었다.
창문 사이로 보이는 후지산에 말을 잃었다. 구름한 점 없는 날씨에 후지산이 이렇게 선명하다니, 어떠한 잡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3박 4일 내내 후지산을 스토킹했다.



이틀차까진 내가 착각했다. 이렇게 날씨가 구름한 점 없는 것은 행운이었다는 걸. 또 하나 느낀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당연한 줄 안다.



3일차, 유명한 녹차밭을 갔는데, 위처럼 구름이 후지산을 가렸다.
아쉬운 대로 녹차밭 주변의 마을이 이뻐보여 그곳이나 조용히 거닐려고 나왔다. 그리고...

마을은 녹차밭에서 꽤나 서쪽에 있는지, 이곳에선 후지산이 조금 얼굴을 드러냈다.
뜻밖의 행운.
그리고 계획대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게 아니라, 숙소까지 6km라 그냥 걷기로 했다. 후지산을 등지고.
그리고 나는 또 하나의 행운.

나는 후지산만 좇아 알지 못했다. 반대편엔 바다가 있다는 것을. 바다가 비추는 마을들은 후지산 못지 않게 아름다웠다.
우리 인생도 이럴 것이다.
무언가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마이너스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대신 우린 다른 문을 열게 될 것이기에, 거기서 뜻밖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포기한다고 잃는 게 아니다. 대신 다른 문이 열릴 것이기에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카페를 들렀다. 녹차로 유명한 도시인데 녹차는 마셔봐야지 않겠나.

3일만에 노트를 처음 꺼내서 메모를 하기 시작한다. 호텔에선 유튜브봤다. 피곤해 죽겠는데 거기서 어떻게 사색을 하냐 ㅇㅈ?
식당에선 밥을 먹었다. 그래도 밥 먹는데만 집중했다. 여기서 갑자기 메모 꺼내서 적는건 너무 또라이같지 않나...
어쨋든 여기선 했다. 단골 손님들의 평온한 대화를 화이트노이즈 삼아...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그를 위해선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언제까지 준비해야 하나?

생각이 아주 술술술 들더이다. 40분 즘 만에 앞으로 취업에 관한 생각 정리를 마쳤다. 생각보다 얼마 안 걸리네 ㅋㅋㅋㅋㅋ

숙소에 돌아오니 후지산은 다시 나를 반겨주었다. 참 나는 이런 운은 좋은 놈이다.

그렇게 3일이 지나가고.... 마지막 4일차.
시내를 처음으로 가볍게 둘러보고

마지막 일정인

후지산을 바라보며 애프터눈티를 하는 것이었다.
1시간 가까이 차만 마시면서, 후지산만 보고 있었다. 핸드폰 안했다.
사실 다른 곳에선 핸드폰 많이 했다. 음악도 들었다. 한국어가 들리면 바로 귀 막았다.
여기선 그러지 않았다. 사실 사색할 것도 없이, 마음에 응어리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냥 아무 생각이 안 들고 저 멀리 응시하게 된다.

사실 나는 3박 4일동안 대식가, 미식가로서 음식은 정복하지 못했다.
처음이라 매운맛이 빠진 음식들이 물리기도, 너무 많이 걸어서 식욕이 없기도, 혼자와서 식당에서 먹는게 부담스럽기도 했다.
게다가 마지막 날엔 급체도 해서 음료만 거의 먹었다.
이것이 인생이다. 아쉬워 말라. 모든 면에서 완벽한 경우가 어딨겠는가?

모든 것은 완벽할 수 없다. 양이 있으면 음이 있는 법. 음이 있음에 짜증내지 말자.


후지산은 숨었다가 나왔다가를 반복했다. 마지막 후지산을 볼 수 있는 30분, 마음껏 사진을 찍었다.


한번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안에서, 어벤저스-엔드게임의 아이언맨 장례식에 나온 음악 "the real hero"를 들으며 깨달았다.
ㅈㄴ 오글거리는 거 아는데, 혼자 여행하는게 생각보다 외롭지 않았다.
이유를 깨달았다. 후지산이 항상 내 옆에 있었구나. 나는 혼자가 아니었구나.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마지막 에피소드가 나를 몰래 맞이하고 있었다.

변수는 당연한 것이다. 변수를 즐기자.

역에서 공항버스를 기다리는데, 버스 기사가 내렸다. 손으로 X 표시를 하시고 다시 올라 타셨다.
보니까 사람이 꽉 찼다. 저 60석이. 이륙까지 2시간 반, 1시간 안에는 공항에 도착해야 했다.
공항버스는 막차였다. 기다린 30-40명이 잠시 벙찌더니, 일단 지하철로 뛰었다.

구글맵으로 검색해보니 공항 주변까지 최대한 지하철로 이동해서, 버스나 택시를 타면 되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설렘 반 두려움 반. 데이터도 다 써서 매우매우 느렸다.
나는 엔화 카드를 충전해두고, 같은 칸의 한국인들 눈치를 봤다.
모든 사람들이 내리려는 곳에는 택시나 버스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이 안 갈 것 같은 루트를 가야했다.

역시 나 혼자 내렸고,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버스가 오지 않았다. 3박4일 동안 구글맵 버스는 거의 다 맞았다. 그런데 왜 얘만 안 오냐고.
갑자기 일본어 혈이 뚫렸다.
서는 버스마다 기사님한테 물어봤다. 이 버스 공항가는건가요? 말이 술술나온다.

택시가 보였다. 일본의 택시는 비싸다던데, 그래도 5만엔은 안 넘겠지? 하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도 내 뒤에 캐리어를 둔, 아마 한국인 남성분이 있었다.
버스가 안오니 이 분이 먼저 오셔서 어떻게 할거냐고 물어보셨다.
5분만 기다려서 안되면 택시를 타자고 내가 제안했다.
택시비 엄청 나올 것 같다고 하셔서, 내가 택시로 향했다. 부끄러움 따위 느낄 시간이 어딨겠는가.

'아노, 에어포트 마데, 다이랴크 오카네 시떼마쓰까?'
공항까지 대략 돈 압니까?

뭐 이런식으로 말했던 거 같다. "얼마에요?" 가 기억이 안났다. 기사님께서는 30분, 5천엔 즘 나올거라고 하셨다. 난 50만원 나올 줄
둘이 탔다. 공항엔 금방 도착했다.

이분도 IT 보안 일을 하셨다. 제주항공에서, 9년차. ㄷㄷ
결국엔 해피엔딩으로 비행기에 탔다.
역시 여행은 계획보단 변수가 기억에 남는다. 인생도 그러할지 모른다.

변수는 당연한 것이다. 변수를 즐기자.

그렇게 나는 후지산의 버프를 받고, 한국에 내렸다. '내일부턴 계획대로, 기한대로 열심히 살아야지'
그러나, 후지산의 버프는 공항버스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에 사라졌다.

아, 하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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